초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사재 약 2,500만 엔(당시 7,000엔)을 투자해 미야지마의 미센산 등산로를 정비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한 대전환점이었는데, 그 변혁의 물결은 오래전부터 신앙의 대상이었던 미야지마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불분리령으로 인한 혼란, 사격제도 도입이라는 격동의 시대에 미야지마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근대화로 이끈 주역들이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시대 미야지마를 지탱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미야지마에 대한 깊은 신앙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메이지 시대 미야지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주역 중 한 명입니다. 근대 일본의 초석을 다진 정치가로 알려진 이토이지만, 개인적으로도 미야지마, 특히 미센산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신앙은 사재를 투자한 대규모 사업으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미센산 산키다이곤겐에 대한 신앙
이토가 특히 신앙한 것은 미센산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산키다이곤겐(三鬼大権現)입니다. 산키다이곤겐은 지비키진(時媚鬼神), 쓰이초키진(追帳鬼神), 마라키진(摩羅鬼神)이라는 세 귀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래의 모습은 대일여래, 부동명왕, 허공장보살이라고 합니다. 신불습합을 강하게 구현한 신앙 대상이었습니다.
이토는 산키도와 다이간지에 편액을 남겼으며, 그의 친필은 현재도 역사민속자료관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센산 본당에 있는 편액도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등산로 정비에 사재 투입
이토 히로부미의 미야지마에 대한 공헌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메이지 39년(1906년)에 실시한 미센산 등산로 정비 사업입니다. 이토는 공비가 아닌 사재를 투자해 이 사업을 실현했습니다. 그 금액은 당시 7,000엔으로, 현재 가치로 약 2,500만 엔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미센산 정상에서의 경치에 깊이 감동한 이토는 “일본 삼경 중 하나의 진가는 정상의 경치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다이쇼인 경내의 대자연석에 비문으로 새겨져 있어 이토의 미센산에 대한 마음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이토는 미센산의 훌륭함을 널리 국내외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등산로를 정비했습니다. 이 정비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미센산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미야지마의 근대적인 관광지화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근대화가 진행되던 메이지 시대에 전통적인 신앙의 장소를 유지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열린 관광지로 발전시킨 이토의 공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랑한 미센산의 매력은 등산을 통해 체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산으로서의 역사를 알면 단순한 관광 이상의 깊은 체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센산 등산을 계획하기 전에 그 역사적 배경을 파악해 두시기 바랍니다.
신불분리가 미야지마에 가져온 변혁
메이지 원년(1868년), 신정부가 발표한 신불분리령은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신불습합의 전통을 가진 미야지마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츠쿠시마 신사의 사전(社殿)은 ‘불교식’으로 판단되어 소각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사전 소각의 위기를 구한 다나모리
이 위기를 구한 것이 이츠쿠시마 신사의 다나모리(棚守)였던 노사카 모토노부였습니다. 다나모리란 현재의 궁사(宮司)에 해당하는 직책입니다. 노사카는 도쿄의 메이지 정부에 직접 호소하여 소각을 막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사전은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불교적이라고 여겨진 사전의 채색이 모두 벗겨지고 백목 건물로 바뀌었습니다. 더욱이 신사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지기(千木)와 가쓰오기(鰹木)가 새로 설치되는 등 ‘복고’라는 명목 아래 사전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사원의 폐지와 건조물의 개칭
센조카쿠(千畳閣)로 알려진 대경당은 내진의 기바나(木鼻)가 잘리고 불상 등이 철거되어 말사 ‘도요쿠니 신사’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미야지마에 있던 많은 사원이 폐사되어 남은 것은 주요 7개 사찰뿐이었습니다. 이츠쿠시마 신사와 센조카쿠, 오중탑에 있던 불상은 사원으로 옮겨졌고, 신불분리로 인한 혼란은 섬 전체에 미쳤습니다.
별당사였던 다이쇼인과 다이간지는 독립된 사원으로 존속했지만, 오랫동안 이츠쿠시마 신사와 일체가 되어 신앙을 지탱해 온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근대 사격제도와 이츠쿠시마 신사의 위치
메이지 정부는 신사를 국가의 종사(宗祀)로 위치시키고 전국의 신사를 등급화하는 근대 사격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 제도는 신사의 국가 관리를 강화하고 신도의 국교화를 추진하는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미야지마에서도 이 근대화 정책은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국폐중사에서 관폐중사로
메이지 4년(1871년), 이츠쿠시마 신사는 근대 사격제도에서 국폐중사(国幣中社)로 열격되었습니다. 국폐사란 기년제와 신상제에 국고에서 폐백료가 공진되는 신사를 말합니다.
그 후 메이지 44년(1911년)에는 관폐중사(官幣中社)로 승격되었습니다. 관폐사는 국폐사보다 격식이 높으며, 예제 때 황실에서 폐백이 공진되는 신사입니다. 이 승격은 이츠쿠시마 신사의 역사적·문화적 중요성이 국가 차원에서 인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근대 국가의 틀 안에서 미야지마의 가치가 정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문화재 보호의 시작
메이지 말기에는 사전이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신불분리로 파괴된 부분을 복구하는 대수리가 메이지 말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실시됩니다. 벗겨졌던 채색이 복원되고 새로 설치되었던 지기와 가쓰오기도 철거되었습니다. 현재 메이지 시대 이츠쿠시마 신사 사진에만 지기와 가쓰오기가 찍혀 있는 것은 이 변천의 증거입니다.
이 수리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키면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때 변경을 강요받았던 사전이 역사적인 모습을 되찾아가는 과정은 일본 근대화에서 문화재 보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의 보존과 근대화의 양립이라는 과제에 당시 사람들이 진지하게 마주한 증거입니다.
오토리이 재건과 근대화의 진전
메이지 8년(1875년), 손상이 진행되었던 오토리이의 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8대째가 되는 오토리이가 현재 우리가 보는 이츠쿠시마 신사의 상징입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전통적인 공법을 지키면서 재건된 오토리이는 미야지마 주역들의 기술과 노력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요 기둥이 되는 녹나무 자연목을 찾는 데 몇 년이나 걸렸고, 최종적으로 미야자키현의 현재 사이토시와 가가와현의 마루가메시에서 조달되었습니다. 그 외의 부재는 히로시마시와 미야지마 내에서 조달되어 재건이 완성되었습니다.
높이 약 16미터, 주요 기둥 둘레 약 10미터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자연목으로 건조하는 기술은 에도 시대부터 계승되어 온 전통 공법의 결정체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재건은 전통 기술을 유지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당시 일본이 직면했던 과제의 축소판이기도 했습니다.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면서도 일본의 전통을 지키는 이 자세는 미야지마의 근대화를 지탱한 주역들에게 공통된 정신이었습니다.
오토리이가 왜 바다 속에 세워졌는지, 그 구조적 노하우를 알면 선인들의 지혜에 놀라게 됩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 시대부터 계승되어 온 신앙과 기술의 역사를 따라가면 풍경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배경을 파악하고 방문하면 사전과 도리이의 의미가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이 가져온 미야지마의 변용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변혁은 미야지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불분리로 인한 혼란, 사격제도에 의한 국가 관리, 문화재 보호의 시작, 그리고 관광지로서의 발전. 이러한 변화는 고대부터 이어진 신앙의 섬으로서의 전통과 근대화 요청 사이에서 갈등을 낳았습니다.
그 가운데 사재 2,500만 엔을 투자해 미센산 등산로를 정비한 이토 히로부미, 사전 소각의 위기에서 미야지마를 구한 노사카 모토노부, 그리고 메이지 말의 대수리를 실현한 사람들. 이 주역들의 노력은 혼란 속에서도 미야지마의 문화적 가치를 지키고 근대화와 전통의 양립을 목표로 한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미야지마의 모습은 메이지 시대의 변혁을 거쳐 형성된 것입니다. 신불습합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근대적인 문화재 보호제도 아래 지켜져 온 풍경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주역들의 결단과 행동 위에 성립되어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메이지 시대 사람들의 공적에 의해 미야지마는 근대화의 파도를 넘어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온 것입니다.
FAQ
신불분리령으로 이츠쿠시마 신사는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사전이 ‘불교식’으로 판단되어 소각 명령이 내려졌으나, 다나모리인 노사카 모토노부가 메이지 정부에 직접 호소하여 소각을 면했습니다. 다만 사전의 채색은 벗겨져 백목 건물로 바뀌었고, 지기와 가쓰오기가 새로 설치되는 등 큰 변경을 받았습니다. 또한 센조카쿠는 도요쿠니 신사로 개칭되었고 많은 사원이 폐사되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미야지마와 어떤 관계가 있었나요?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미센산 산키다이곤겐을 깊이 신앙했으며, 메이지 39년(1906년)에 사재 약 7,000엔(현재 가치로 약 2,500만 엔)을 투자해 미센산 등산로를 정비했습니다. “일본 삼경 중 하나의 진가는 정상의 경치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미센산 본당과 산키도에는 이토의 친필 편액이 남아 있습니다.
근대 사격제도에서 이츠쿠시마 신사는 어떤 위치였나요?
메이지 4년(1871년)에 국폐중사로 열격되었고, 메이지 44년(1911년)에는 관폐중사로 승격되었습니다. 관폐중사는 예제 때 황실에서 폐백이 공진되는 격식 높은 신사로, 이츠쿠시마 신사의 역사적·문화적 중요성이 국가 차원에서 인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메이지 시대의 오토리이는 언제 건립되었나요?
현재의 오토리이(8대째)는 메이지 8년(1875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주요 기둥이 되는 녹나무 자연목은 미야자키현 사이토시와 가가와현 마루가메시에서 조달되었고, 기타 부재는 히로시마시와 미야지마 내에서 조달되었습니다. 높이 약 16미터, 주요 기둥 둘레 약 10미터의 거대한 구조물입니다.
신불분리로 사라진 채색은 복원되었나요?
네, 메이지 말에 사전이 국보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메이지 말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대수리가 이루어져 신불분리로 벗겨진 채색이 복원되었습니다. 이때 새로 설치되었던 지기와 가쓰오기도 철거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현재 메이지 시대 이츠쿠시마 신사 사진에만 지기와 가쓰오기가 찍혀 있는 것은 이 변천의 증거입니다.
미야지마에서 메이지 유신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역사민속자료관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 편액을 볼 수 있으며, 다이쇼인 경내에는 이토가 남긴 “일본 삼경 중 하나의 진가는 정상의 경치에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진 대자연석이 있습니다. 또한 미센산 본당과 산키도에서도 이토의 친필 편액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불분리 이후에도 미야지마에 남은 사찰은 어디인가요?
신불분리로 많은 사원이 폐사되었지만, 주요 7개 사찰이 남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별당사였던 다이쇼인과 다이간지가 독립된 사원으로 존속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찰들에서는 이츠쿠시마 신사와 오중탑 등에서 옮겨진 불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정리
메이지 유신은 미야지마에 큰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가 사재 약 2,500만 엔을 투자해 미센산 등산로를 정비하고, 다나모리인 노사카 모토노부가 사전 소각의 위기를 구했으며, 근대 사격제도 아래 이츠쿠시마 신사는 관폐중사로 승격되었습니다. 이 주역들의 노력에 의해 미야지마는 근대화의 파도를 넘어 문화재로 보호받으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미야지마의 모습은 메이지 시대에 미야지마를 지탱한 사람들의 발자취 위에 성립되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