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아키국(현재의 히로시마현) 미야지마. 바다 위에 떠 있는 이 신의 섬은 헤이안시대 도읍의 귀족들에게 특별한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헤이안 귀족과 미야지마의 관계는 단순히 지방 신사로의 참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후지와라씨를 비롯한 섭관가, 인세이(院政) 시기의 법황들, 그리고 헤이케 일족. 그들은 앞다투어 미야지마로 참배하며 호화로운 봉납품을 바쳤습니다. 이 글에서는 왜 헤이안시대 귀족들이 미야지마를 숭경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신앙의 실태를 자세히 해설합니다.

헤이안 귀족과 미야지마 신앙의 역사적 전개
헤이안 초기: 신불습합과 미야지마의 지위 향상
헤이안시대 초기, 미야지마의 이쓰쿠시마 신사는 점차 중앙 귀족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배경에는 신불습합 사상의 침투가 있었습니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제신인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市杵島姫命)가 불교의 변재천(弁才天)과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재천은 음악·언변·재복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헤이안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후지와라씨 등 섭관가 사람들은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변재천의 가호를 구했다고 전해집니다. 미야지마가 ‘아키국의 이치노미야(一宮)’로 격상된 것도 이 시기 신앙의 고조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엔기 5년(905년)에 편찬된 『엔기시키(延喜式)』에는 이쓰쿠시마 신사가 ‘묘진타이샤(名神大社)’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는 조정이 특별히 중시하는 신사의 격으로, 도읍의 귀족들도 미야지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섭관기: 후지와라씨의 깊은 신앙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친 섭관정치 시대, 후지와라씨 일족은 미야지마에 대한 신앙을 더욱 깊이해 갔습니다. 섭정이나 관백으로서 권력을 쥔 후지와라씨에게 정치적 안정과 일족의 번영은 최중요 과제였습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시대에는 아키국을 지교국(知行国)으로 삼아 지배하에 두고 미야지마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강화했습니다. 미치나가의 일기 『미도칸파쿠키(御堂関白記)』에는 미야지마에 관한 기술이 적지만, 아키국 경영에 힘을 기울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후지와라씨의 귀족들은 대참자를 파견하여 미야지마에 참배시키고 호화로운 봉납품을 바쳤습니다. 당시 귀족에게 원거리 참배는 큰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가신을 대신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봉납품에는 경전·불구·무구·조도품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인세이기: 고시라카와 법황과 미야지마 숭경
12세기에 들어 인세이가 시작되면서 미야지마 신앙은 더욱 성행했습니다. 특히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야지마를 깊이 숭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호겐 원년(1156년), 고시라카와 천황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미야지마에 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고시라카와 법황이 미야지마를 중시한 이유 중 하나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영향이었습니다. 기요모리는 아키노카미(安芸守)로서 미야지마 정비에 진력했고, 법황에게 미야지마의 훌륭함을 전했다고 합니다. 법황은 기요모리를 통해 미야지마에 봉납을 하고, 신사의 위광을 높임으로써 헤이케 정권을 지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고시라카와 법황은 구마노 신앙에도 독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야지마 역시 ‘바다의 구마노’로 자리매김되어 있었습니다. 해상 교통의 요충지인 미야지마는 서국으로의 항로 안전을 기원하는 장소로서도 중시되었습니다.
헤이안 귀족의 미야지마 참배 실태
도읍에서 미야지마까지의 참배 경로
헤이안쿄에서 미야지마까지는 육로와 해로를 조합한 긴 여행이었습니다. 일반적인 경로는 먼저 교토에서 산요도를 서쪽으로 나아가 빈고국(현재의 히로시마현 동부)의 도모노우라(鞆の浦)까지 육로로 이동했습니다.
도모노우라에서부터는 배로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를 진행합니다. 조류 대기 항구로 알려진 도모노우라에서 조류의 흐름을 기다렸다가 순조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스오국(현재의 야마구치현)의 무로즈미(室積) 등 항구에서 휴식을 취하며 최종적으로 미야지마 맞은편인 이쓰쿠시마우라에 도착했습니다.
이 여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도 편도 10일에서 2주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기상 불순이나 계절풍의 영향으로 더 장기화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위 귀족이 직접 참배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대참자를 파견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참배의 양식과 의례
귀족의 미야지마 참배에는 엄격한 의례가 수반되었습니다. 출발 전에는 음양사에 의한 길일 선정, 모노이미(物忌)를 통한 몸의 정화, 신불에 대한 기원 등이 행해졌습니다.
미야지마에 도착하면 먼저 해안에서 미소기(禊)를 행하여 몸을 정화했습니다. 그 후 사전으로 나아가 헤이하쿠(幣帛)를 봉납하고 노리토(祝詞)를 주상했습니다. 귀족의 대참자는 주인의 명대로서 신전에서 기원문을 읽어 올리고 봉납품을 바쳤습니다.
봉납품은 경권이 중심이었지만, 그 외에도 거울·태도·마구·비단직물 등 당시의 귀족 문화를 반영한 호화로운 물품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봉납품의 일부는 현재도 이쓰쿠시마 신사에 전해져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봉납된 문화재의 수많은 보물들
헤이안 귀족이 미야지마에 봉납한 물품들은 당시 귀족 문화의 정수를 모은 것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봉납한 ‘헤이케 납경(平家納経)’입니다. 닌안 2년(1167년)에 봉납된 이 경권은 헤이케 일족이 사경한 법화경 등을 담은 것으로, 장식의 호화로움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후지와라씨를 비롯한 귀족들이 봉납한 ‘구노지경(久能寺経)’도 중요합니다. 이는 헤이안시대 후기에 사경된 일체경으로, 극채색의 장식이 되어 있습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이쓰쿠시마 신사의 보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무구류에서는 ‘금동장운주부투조안(金銅荘雲珠付透彫鞍)’ 등 실용성보다 장식성을 중시한 호화로운 물품들이 봉납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신에 대한 봉납품인 동시에 봉납자의 재력과 지위를 과시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습니다.
헤이안 귀족의 미야지마 신앙이 갖는 역사적 의의
헤이안 귀족의 미야지마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정치·경제·문화 각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중앙 귀족이 지방의 유력 신사를 지원함으로써 지방 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미야지마가 있는 아키국은 세토나이카이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서 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후지와라씨나 헤이케가 미야지마를 중시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던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귀족의 봉납에 의해 미야지마에 막대한 부가 집적되었습니다. 봉납품뿐만 아니라 참배자들이 떨어뜨리는 경제 효과도 컸고, 미야지마 주변의 지역 경제를 윤택하게 했습니다. 또한 신사의 사령(社領)도 확대되어 이쓰쿠시마 신사는 아키국 내에서 큰 경제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도읍의 세련된 귀족 문화가 미야지마를 통해 서국에 전해졌습니다. 봉납된 경전이나 미술품은 지방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미야지마 자체가 문화의 교류 거점이 되어 교토와 서국을 잇는 문화적 가교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헤이안 귀족의 미야지마 신앙은 신불습합 사상의 실천 사례로서도 중요합니다. 신도의 신인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와 불교의 변재천이 일체화되어 신사이면서도 불교적 요소를 지닌 독특한 신앙 형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종교 문화의 특징인 신불습합을 상징하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이어지는 헤이안 귀족 신앙의 가치
헤이안 귀족의 미야지마 신앙은 현대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쓰쿠시마 신사에 전해지는 국보·중요문화재의 다수는 헤이안시대 귀족들이 봉납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재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헤이케 납경은 헤이안시대 장식경의 최고 걸작으로서 미술사상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매년 많은 연구자와 문화재 애호가들이 미야지마를 방문하여 이러한 문화재를 통해 헤이안시대의 귀족 문화를 접하고 있습니다.
또한 헤이안 귀족의 미야지마 참배 전통은 현대의 관광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교토에서 미야지마로의 여행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문화 체험이 되고 있습니다. 세토나이카이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면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은 헤이안 귀족들이 느꼈던 감동을 추체험할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FAQ
헤이안 귀족은 왜 멀리 떨어진 미야지마를 신앙했나요?
미야지마의 제신인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가 불교의 변재천과 동일시되어 음악·언변·재복의 신으로서 헤이안 귀족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토나이카이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략적 중요성도 있었고, 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습니다.
후지와라씨는 실제로 미야지마를 방문했나요?
섭정이나 관백을 지낸 후지와라씨의 고위 귀족이 직접 미야지마를 방문한 기록은 적고, 대부분은 신뢰할 수 있는 가신을 대참자로 파견했습니다. 당시 교토에서 미야지마까지는 편도 10일에서 2주가 소요되는 긴 여행이었기에 고위 귀족이 자주 방문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야지마에 어떤 관여를 했나요?
고시라카와 법황은 미야지마를 깊이 숭경하며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통해 많은 봉납을 했습니다. 법황은 구마노 신앙으로도 유명하지만 미야지마를 ‘바다의 구마노’로 자리매김하고 서국으로의 항로 안전을 기원하는 장소로 중시했습니다. 헤이케 정권을 지지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헤이안 귀족이 봉납한 문화재는 현재도 남아 있나요?
네, 많은 문화재가 현재도 이쓰쿠시마 신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봉납한 ‘헤이케 납경’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경권·거울·태도·마구 등 헤이안시대의 귀족 문화를 전하는 귀중한 물품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미야지마의 보물관에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도읍에서 미야지마까지 어떤 경로로 참배했나요?
교토에서 산요도를 서쪽으로 나아가 빈고국의 도모노우라까지 육로로 이동하고, 거기서 배로 세토나이카이를 서쪽으로 향하는 경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도모노우라에서 조류를 기다려 순조를 타고 스오국의 무로즈미 등에서 휴식을 취하며 미야지마 맞은편의 이쓰쿠시마우라에 도착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어도 편도 10일에서 2주가 소요되는 긴 여행이었습니다.
신불습합은 미야지마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신불습합 사상에 의해 미야지마의 제신인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가 불교의 변재천과 동일시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신사이면서도 불교적 요소를 지닌 독특한 신앙 형태가 형성되어 헤이안 귀족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신도와 불교가 융합된 일본 고유의 종교 문화를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미야지마의 봉납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무엇인가요?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봉납한 ‘헤이케 납경’입니다. 1167년에 봉납된 이 경권은 헤이케 일족이 사경한 법화경 등을 담은 것으로, 극채색의 호화로운 장식으로 헤이안시대 장식경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이쓰쿠시마 신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정리
헤이안시대 귀족들에게 미야지마는 단순한 지방 신사가 아니라 정치·경제·문화가 교차하는 중요한 신앙의 장이었습니다. 후지와라씨를 비롯한 섭관가, 고시라카와 법황, 그리고 헤이케 일족이 앞다투어 미야지마를 숭경하고 호화로운 봉납품을 바쳤습니다.
도읍에서 편도 10일 이상이 걸리는 긴 여행을 거쳐 대참자들이 운반한 봉납품들은 현재도 국보·중요문화재로서 이쓰쿠시마 신사에 전해져 헤이안 귀족의 깊은 신앙과 문화의 높이를 오늘날에 전하고 있습니다. 신불습합 사상 아래 이치키시마히메노미코토와 변재천이 일체화된 미야지마의 신앙은 일본 종교 문화의 특징을 상징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헤이안 귀족의 미야지마 신앙이 갖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의의는 현대에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이쓰쿠시마 신사의 문화재를 방문하는 것은 헤이안시대 귀족들이 느꼈던 신앙의 깊이와 그들이 남긴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인식하는 귀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참고문헌·출처
- 문화청 문화유산 온라인: 이쓰쿠시마 신사(세계유산)
- 문화청 국지정문화재등 데이터베이스: 이쓰쿠시마 신사
- 히로시마현 교육위원회 문화재과
- 이쓰쿠시마 신사 공식 사이트: 유서
- 일반사단법인 미야지마 관광협회: 세계문화유산 등록
- 나라국립박물관: 이쓰쿠시마 신사 국보전
- 현립 히로시마대학 미야지마학센터
- 미야지마초사 편찬위원회 『미야지마초사 통사편』 미야지마초, 1992년
- 고미 후미히코 『인세이기 사회의 연구』 야마카와출판사, 1984년
- 모토키 야스오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고시라카와인』 가도카와서점, 2012년
-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Itsukushima Shinto Sh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