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이쓰쿠시마 신사가 자리한 미야지마는 다이라노 기요모리 시대부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된 신성한 땅입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신사의 위세는 쇠퇴하고 황폐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미야지마를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 바로 1555년(고지 원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모리 모토나리였습니다. 모토나리는 전투로 신성한 땅을 더럽힌 것을 깊이 부끄럽게 여기고 신사 건물의 대대적인 복원을 단행하며 이쓰쿠시마 신사에 대한 깊은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야지마와 모리 모토나리의 깊은 관계, 이쓰쿠시마 전투가 벌어진 구체적인 장소, 그리고 모토나리가 미야지마의 지형을 활용하여 스에 하루카타의 대군을 격파한 전투의 진실을 파헤칩니다.
이쓰쿠시마 신사와 모리 모토나리의 관계 | 신성한 땅을 지킨 전국무장
이쓰쿠시마 신사는 593년(스이코 천황 원년)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헤이안 시대 말기에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현재의 해상 신전으로 정비했습니다. 그러나 헤이케 멸망 후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신사의 위세는 점차 쇠퇴하고 황폐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이쓰쿠시마 신사를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 모리 모토나리입니다. 1555년(고지 원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격파한 모토나리는 전투로 신성한 땅을 더럽힌 것을 깊이 부끄럽게 여기고 신사 건물의 대대적인 복원에 착수했습니다. 양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신속히 맞은편 육지로 옮기고, 피로 물든 흙과 모래는 모두 걷어내어 바다에 버렸으며, 피로 더럽혀진 회랑 일부는 바닥판을 새것으로 교체했다고 전해집니다.
나아가 모토나리는 1571년(겐키 2년), 1568년(에이로쿠 11년)에 발생한 와치 도모하루·유다니 모토이에 형제 사건(본전에서 모반 혐의를 받은 형제가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본사 본전을 재건했습니다. 현존하는 본전은 이때 모토나리가 조영한 것으로, 면적 약 271㎡(82평)라는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합니다. 또한 모토나리와 적자 다카모토는 대도리이도 재건했으며, 히라부타이(평무대)의 석주도 모토나리의 기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모리 가문의 이쓰쿠시마 신사에 대한 신앙은 날로 깊어져 갔습니다. 모토나리를 승리로 이끈 이쓰쿠시마 신사는 ‘무운(武運)’의 신으로서 전국무장들로부터 숭배를 받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무운장구의 기원을 위해 참배했습니다.
모토나리와 이쓰쿠시마 신사의 관계는 단순한 정치적 보호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이와미 은광에서 얻은 수입의 약 10%를 천궁(遷宮) 비용에 지출하는 등, 모토나리의 이쓰쿠시마 신사에 대한 신앙은 진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신사 건물의 상당수가 모토나리 시대에 정비된 것이며, 미야지마의 경관은 모토나리에 의해 지켜진 것입니다.
이쓰쿠시마 전투의 무대가 된 장소 | 미야지마의 지리와 유적
쓰쓰미가우라(包ヶ浦) | 모리군 상륙 지점
쓰쓰미가우라는 미야지마의 동북쪽 해안에 위치한 포구로, 1555년(고지 원년) 9월 30일 밤, 모리 모토나리가 이끄는 본대 약 2,000명이 이곳에 상륙했습니다. 폭풍우 속에서 어둠을 틈타 결사의 도해였습니다. 현재는 쓰쓰미가우라 자연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모리 모토나리 상륙 지점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모토나리가 부하에게 “여기는 무엇이라 하는 곳이냐”고 묻자 “포구는 쓰쓰미가우라, 산등성이는 바쿠치오라 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모토나리는 “북도 치는 것(쓰쓰미=고무), 노름도 치는 것(바쿠치=도박), 마침내 적을 쳐서 이길 때가 왔다”며 크게 기뻐하고, 아군의 암호를 ‘우쓰(치다)’와 ‘가쓰(이기다)’로 정했다고 전해집니다. 상륙 후 모토나리는 모든 군선을 돌려보내라고 고다마 나리카타에게 명하여 배수진의 결의를 장병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바쿠치오(博奕尾) | 기습 출격 지점
쓰쓰미가우라에서 험준한 산길을 올라간 끝에 있는 능선이 바쿠치오입니다. 모리군은 어둠 속에서 이 험한 산길을 약 4km에 걸쳐 올라 새벽 6시(묘시) 무렵 바쿠치오 능선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스에군의 본진이 있는 도노오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절호의 위치였습니다.
바쿠치오라는 지명을 들은 모토나리는 “옛날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가쓰우라에 상륙하여 헤이케를 이겼다. 지금 우리는 이 바쿠치오에 올랐다. 노름도 치는 것, 이 싸움은 이미 쳐서 이겼다”며 장병들을 격려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길조를 점치는 말이 장병들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도노오카(塔の岡) | 스에군 본진 터
도노오카는 이쓰쿠시마 신사의 동쪽에 위치하며, 현재 오중탑과 도요쿠니 신사(센조카쿠)가 있는 장소입니다. 스에 하루카타는 9월 21일 이곳에 본진을 두고, 미야오 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절호의 위치에서 공격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10월 1일 이른 아침, 바쿠치오에서 함성을 지르며 내달려온 모리군의 기습을 받아 도노오카는 격전의 장이 되었습니다. 허를 찔린 스에군은 좁은 섬 안에 대군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진퇴가 불가능해지며 총궤멸 상태가 되었습니다.
오모토노우라(大元浦) | 스에군 상륙 지점
오모토노우라는 이쓰쿠시마 신사의 서쪽에 위치하며, 현재의 미야지마 수족관 부근에 해당합니다. 1555년(덴분 24년) 9월 21일, 스에 하루카타는 50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이 오모토노우라에서 상륙했습니다. 스에군은 약 2만의 대군으로, 다이쇼인과 미센에 이르기까지 넓게 진을 치고 바다 쪽도 경비선으로 메웠습니다.
패전 후 하루카타는 다시 이 오모토노우라로 도망쳐 야마구치에서 재기를 도모하고자 섬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배들은 무라카미 수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고 더 서쪽으로 도주하게 됩니다.
오에우라·다카야스가하라 | 스에 하루카타 자결지
오에우라(大江浦)는 미야지마 서부에 위치한 포구로, 스에 하루카타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수의 측근들만의 호위를 받으며 하루카타는 배를 구하려 오에우라까지 도착했지만, 이미 탈출 수단은 없었습니다. “무엇을 아끼고 무엇을 원망하랴, 원래부터 이 형상이 정해진 몸인 것을”이라는 지세가(辭世歌)를 남기고 이카가 후사아키의 개조(介錯, 할복 시 목을 베어 고통을 덜어주는 것)로 자결했습니다. 하루카타의 수급은 며칠 후 모리군에 의해 발견되어 맞은편 하쓰카이치에 있는 도운지(洞雲寺)에 매장되었습니다.
미야오 성(宮尾城) | 모리군이 쌓은 미끼 성
미야오 성은 아리노우라에 축성된 성으로, 모리 모토나리가 스에 하루카타를 미야지마로 유인하기 위해 세운 미끼였습니다. 1555년(덴분 24년) 5월, 모토나리는 고이 나오유키와 쓰보이 모토마사에게 500명의 군세를 주어 이 성에 들여보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함락시키기 쉽도록 간소한 구조였다고도 합니다. 스에군은 여러 차례 이 성을 공격했지만, 모리군은 필사적으로 농성하며 하루카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습니다.
이쓰쿠시마 전투는 왜 일어났는가 | 알기 쉽게 해설
오우치 요시타카의 죽음과 모토나리의 결단
1551년(덴분 20년), 중국·규슈 지방에 권세를 떨치던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하루카타의 모반으로 살해되었습니다(다이네이지의 변). 요시타카는 문예와 사원 보호에 열중하여 무단파 가신들의 반발을 샀던 것입니다. 하루카타는 오토모 요시시게의 동생 하루히데(후의 오우치 요시나가)를 옹립하고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요시타카와 동맹 관계에 있던 모리 모토나리에게 이것은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카타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면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아키·빈고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결별의 길 | 오리시키바타 전투
1554년(덴분 23년) 5월, 이와미 지방의 요시미 마사요리가 스에 씨 타도를 내걸고 거병하자, 모토나리는 이에 호응하여 스에 씨와 결별했습니다. 모토나리는 사쿠라오 성 등 4개 성을 공략하고 마침내 미야지마까지 점령합니다.
격분한 하루카타는 미야가와 후사나가에게 모토나리 토벌을 명했지만, 모토나리는 사쿠라오 성에서의 ‘오리시키바타 전투’에서 약 7,000의 대군을 불과 3,000의 병력으로 격파했습니다. 이 승리로 모토나리의 명성이 높아지고 양측의 대립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왜 미야지마가 전장이 되었는가
미야지마는 단순한 신성한 땅이 아니라 세토내해 해상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였습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일송무역의 중계 거점으로 삼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섬을 지배하는 것은 세토내해의 제해권을 쥐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병력에서 열세인 모토나리는 육상 평지전에서는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원군이 올 수 없는 고립된 섬에서 기습을 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야지마는 지형이 험준하고 대군이 전개할 수 있는 평지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또한 섬이라는 특성상 보급로와 퇴로가 제한되는 위험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모토나리는 이 지형적 제약을 역이용하여 하루카타를 미야지마로 유인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쓰쿠시마 전투 결전 | 미야지마의 지형을 활용한 전법
스에군의 상륙과 포진 | 오모토노우라에서 도노오카로
1555년(덴분 24년) 9월 21일, 스에 하루카타는 500척의 대선단을 조직하여 약 2만의 군세와 함께 오모토노우라(현재의 미야지마 수족관 부근)에서 상륙했습니다. 미우라 후사키요와 야마토 오키타케가 선봉을 맡았고, 하루카타의 본진은 미야오 성이 내려다보이는 도노오카(현재의 오중탑·도요쿠니 신사 부근)에 배치되었습니다.
스에군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다이쇼인과 미센에 이르기까지 넓게 진을 치고 바다 쪽도 경비선으로 메웠습니다. 그러나 좁은 섬 안에 2만의 대군을 전개시킨 것이 후에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폭풍우 밤의 도해 | 쓰쓰미가우라 상륙
9월 30일, 모토나리는 군을 셋으로 나눴습니다. 제1군은 모토나리·다카모토·모토하루 등이 이끄는 본대 약 2,000명, 제2군은 다카카게를 대장으로 하는 고바야카와 대 약 1,500명, 제3군은 무라카미 수군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날씨가 거칠어지기 시작해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가 되었지만, 모토나리는 “오늘은 길일”이라 칭하며 비바람이야말로 하늘의 가호라고 설파하고 저녁 6시(유시) 무렵 출진을 결행했습니다.
모토나리의 본대는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모토나리가 탄 배에만 횃불을 밝히고, 미야지마를 몰래 동쪽으로 돌아 밤 9시(이누이시) 무렵 쓰쓰미가우라에 상륙했습니다. 상륙 후 모토나리는 모든 군선을 돌려보내도록 명하여 배수진의 결의를 보여주고, 깃카와 군을 선봉으로 바쿠치오 산을 넘기 위해 어둠 속을 진군했습니다.
한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별동대는 적의 정면인 대도리이 방면으로 당당히 들어가, 수상히 여기는 적에게 “이것은 지쿠젠의 무나카타·아키즈키 배로 아군에 합류하러 온 것입니다”라며 스에 측 원군으로 위장하고, 이쓰쿠시마 신사 대도리이 앞에서 대기했습니다.
바쿠치오에서의 기습 | 미야지마의 험준한 지형이 승패를 갈랐다
폭풍우와 어둠 속에서 모리군은 약 4km에 걸친 험준한 산길을 계속 올랐습니다. 이 행군은 극히 어려웠지만, 스에군에게 들키지 않고 바쿠치오 능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10월 1일 새벽 6시(묘시), 바쿠치오 능선에서 모리군 본대가 함성을 지르며 스에군의 배후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대도리이 앞에서 대기하던 고바야카와 대와 미야오 성 농성병도 도노오카를 향해 달려 올라가 스에군을 협공했습니다. 앞바다에서 대기하던 무라카미 수군도 스에 수군을 공격하여 배를 불태웠습니다.
전날 밤의 폭풍우로 방심하고 있던 스에군은 좁은 섬 안에 대군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진퇴가 불가능해지며, “스에, 히로나카는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서쪽 산으로 물러갔다”라고 기록될 정도의 총궤멸 상태가 되었습니다. 미야지마의 지형적 제약이 스에군의 수적 우위를 완전히 무효화시킨 것입니다.
스에 하루카타의 최후 | 오에우라에서의 자결
도노오카의 본진을 잃은 스에군은 신사 뒤로 물밀 듯이 패주했습니다. 하루카타는 오모토노우라까지 도망쳐 야마구치에서 재기를 도모하려 했지만, 항구에 있어야 할 배는 무라카미 수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소수의 측근들만의 호위를 받으며 하루카타는 더 서쪽의 오에우라까지 도주했지만, 이미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아끼고 무엇을 원망하랴, 원래부터 이 형상이 정해진 몸인 것을”이라는 지세가를 남기고 이카가 후사아키의 개조로 자결했습니다. 향년 35세. 그의 수급은 며칠 후 모리군에 의해 발견되어 맞은편 하쓰카이치에 있는 도운지에 매장되었습니다.
한편, 다이쇼인 부근에서 깃카와 모토하루 등과 교전한 후 철수했던 히로나카 다카카네는 미센 기슭의 계곡을 달려 올라 수하 100~300명을 이끌고 고마가바야시에 있는 류가바바라고 불리는 바위 지대에 농성했습니다. 산정을 포위한 깃카와 군의 맹공에 격렬히 항전했지만, 10월 3일에 전사했습니다. 모리군이 벤 수급은 4,785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전후 미야지마 대응 | 신성한 땅의 청소와 신사 재건
전투는 10월 1일 새벽에 시작되어 같은 날 오후 2시경에는 대체로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모토나리에게는 승리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신성한 땅인 미야지마를 더럽힌 것에 대한 속죄였습니다.
모토나리는 이쓰쿠시마 신사에 대해 참으로 황공하다고 생각하며 즉시 전후 처리에 착수했습니다. 양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신속히 맞은편 육지로 옮기고, 피로 물든 흙과 모래는 모두 걷어내어 바다에 버렸습니다. 피로 더럽혀진 회랑 일부는 바닥판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그 외에는 바닷물로 씻어 정화하여 전쟁 전의 모습으로 되돌렸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모리 가문의 중국 지방에서의 지위는 급격히 높아지는 동시에 모리 가문의 이쓰쿠시마 신사에 대한 신앙도 날로 깊어져 갔습니다. 모토나리는 전후 대대적인 신사 복원을 실시하고 1571년(겐키 2년)에는 본사 본전을 재건했습니다. 또한 다카모토와 함께 대도리이를 재건하는 등 이쓰쿠시마 신사의 보호에 힘을 쏟았습니다.
모토나리를 승리로 이끈 이쓰쿠시마 신사는 ‘무운’의 신으로서 전국무장들로부터 숭배를 받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규슈 원정 도중 이쓰쿠시마 신사에 참배하여 무운장구의 기원과 함께 대경당(현재의 센조카쿠) 조영을 실시했습니다. 기요모리에 이어 모토나리를 승리로 이끈 것으로, 이쓰쿠시마 신사는 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다시 융성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쓰쿠시마 신사와 모리 모토나리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모토나리는 이쓰쿠시마 전투 승리 후 전투로 신성한 땅을 더럽힌 것을 깊이 부끄럽게 여기고 신사 건물의 대대적인 복원을 실시했습니다. 1571년(겐키 2년)에는 본사 본전을 재건하고 다카모토와 함께 대도리이를 재건했습니다. 현존하는 본전은 모토나리가 조영한 것으로, 면적 약 271㎡(82평)라는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합니다. 모토나리의 이쓰쿠시마 신사에 대한 깊은 신앙이 미야지마를 다시 융성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쓰쿠시마 전투의 주요 유적지는 어디에 있나요?
쓰쓰미가우라(모리군 상륙 지점), 바쿠치오(기습 출격 지점), 도노오카(스에군 본진, 현재의 오중탑·도요쿠니 신사 부근), 오모토노우라(스에군 상륙 지점, 현재의 미야지마 수족관 부근), 오에우라(스에 하루카타 자결지), 미야오 성(모리군이 쌓은 미끼 성) 등이 주요 유적지입니다. 쓰쓰미가우라에는 모리 모토나리 상륙 지점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쓰쿠시마 전투는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1555년(고지 원년) 9월 21일 스에군이 오모토노우라에서 상륙하여 도노오카에 본진을 두었습니다. 9월 30일 밤, 모리군은 폭풍우 속에서 쓰쓰미가우라에 상륙하고 험준한 산길을 올라 바쿠치오 능선에 도착했습니다. 다음 날 10월 1일 이른 아침, 바쿠치오에서 스에군의 배후를 기습하고 대도리이 앞에서 공격해 올라온 고바야카와 대와 협공하여 승리를 거뒀습니다.
왜 모리 모토나리는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나요?
미야지마의 지형을 완벽하게 활용한 전술이 승인이었습니다. 좁은 섬 안에 2만의 스에군을 유인하여 지형적 제약으로 수적 우위를 무효화시켰습니다. 폭풍우와 어둠을 이용한 쓰쓰미가우라 상륙, 험준한 산길을 올라 바쿠치오에서의 기습, 대도리이 앞에서의 별동대에 의한 협공, 무라카미 수군에 의한 해상 봉쇄 등 모든 것이 계산된 작전이었습니다.
이쓰쿠시마 전투 후 모리 모토나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쓰쿠시마 전투의 승리를 발판으로 모토나리는 스오 지방으로 침공하여 1557년(고지 3년)에 오우치 요시나가를 토벌하고 오우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나아가 1566년(에이로쿠 9년)에는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키고 아키·빈고·스오·나가토·이와미·이즈모 6개 지방을 지배하는 중국 지방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일개 지방 영주에서 중국 지방 120만 석의 대다이묘로 일대에 올라선 것입니다.
전쟁터 유적지를 직접 방문할 수 있나요?
네, 가능합니다. 쓰쓰미가우라 자연공원에서는 모리 모토나리 상륙 지점 기념비를 볼 수 있고, 쓰쓰미가우라에서 바쿠치오를 거쳐 도노오카로 이어지는 모리군의 행군로 약 4km는 현재 하이킹 코스로 걸을 수 있어 당시 장병들의 고생을 추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중탑과 도요쿠니 신사(센조카쿠)가 있는 도노오카는 이쓰쿠시마 신사에서 도보로 쉽게 접근 가능합니다.
이쓰쿠시마 전투 관련 볼거리는 무엇이 있나요?
모토나리가 재건한 이쓰쿠시마 신사 본전과 대도리이, 도노오카에 있는 오중탑과 도요쿠니 신사(센조카쿠), 쓰쓰미가우라의 기념비 등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또한 미야지마 역사민속자료관에서는 이쓰쿠시마 전투 관련 자료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마무리
모리 모토나리와 미야지마의 관계는 이쓰쿠시마 전투라는 극적인 전쟁을 통해 맺어졌습니다. 모토나리는 쓰쓰미가우라에서 바쿠치오로, 그리고 도노오카로의 기습이라는 미야지마의 지형을 완벽하게 활용한 전술로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뒤집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전후 모토나리는 신성한 땅을 더럽힌 것을 깊이 부끄럽게 여기고 신사 건물의 대대적인 복원을 실시하며, 본사 본전 재건과 대도리이 재건 등 이쓰쿠시마 신사의 보호에 힘을 쏟았습니다. 현존하는 신사 건물의 상당수는 모토나리 시대에 정비된 것이며, 미야지마의 경관은 모토나리에 의해 지켜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쓰쿠시마 전투를 계기로 모리 모토나리는 중국 지방의 패자로 부상했고, 이쓰쿠시마 신사는 무운의 신으로서 전국무장들로부터 숭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미야지마와 모리 모토나리의 이야기는 전국시대 신성한 땅과 무장의 깊은 인연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습니다.
